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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umn 2024
ECO 트렌드

고칠 권리? 오래 쓸 의무! ‘수리’로 지키는 지구인의 자세

정든 물건을 고치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보냈거나 작은 결함임에도 당연하게 새 제품을 구매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물건, 지금 나와 헤어져도 좋을까?
사람이 아프면 약을 먹어 고치듯이, 물건에는 수리가 필요하다.
‘소유자가 해당 제품을 직접 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키는 ‘수리권’을 소개한다.

약골 우산, 잠자던 전자제품의 부활

“드르륵 툭 탁.”

누군가 휴대용 선풍기의 나사를 풀어 분해하고 있다. 전동기에 감겨 있던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이음새가 부러지지 않도록 조심히 열어 안에 든 배터리를 확인한다. 또 다른 이는 분해한 드라이어 안에서 눌어붙은 플라스틱 조각들을 떼어내고 있다. 서울 망원동에 위치한 ‘수리상점 곰손’의 수리 풍경이다. 흔히 ‘손풍기’라고 불리는 휴대용 선풍기는 걸핏하면 고장 나 해마다 새로 사기 일쑤다. 가격도 그리 높지 않으니 고장 나면 새로 사고 또 사는 걸 반복하는 식이다. 비단 손풍기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얼마 안 가 못 쓰게 되어 버리는 제품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망가진 가전제품 일부는 배터리를 교체하거나 재조립을 하는 등 간단한 방법으로 고칠 수 있다.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을 뿐.

▲ 드라이어를 분해해 수리하는 모습
출처: 수리상점 곰손 인스타그램 @gomson_repair
▲ 수리에 사용되는 공구
출처: 수리상점 곰손 인스타그램 @gomson_repair

올해 2월에 문을 연 ‘수리상점 곰손’은 그릇, 소형 전자제품, 스마트폰, 의류 등 다양한 물건에 대한 수리 워크숍과 수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의 수리 워크숍에서는 강사의 안내에 따라 본인의 물품을 직접 고쳐볼 수 있다. 수강생의 연령층은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데, 이는 ‘수리권’에 관심이 있거나 혹은 개념을 구체화하지 않았어도 그 중요성을 느끼고 있던 사람이 많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다.

▲ 부천시 리본(REBORN)우산 포스터
출처: 부천시청

우산 또한 살 하나만 망가져도 ‘사용할 수 없는 물건’으로 여겨져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서울 종로구‧동대문구‧서초구, 부천시 등 여러 지자체에서는 망가진 우산을 고치는 수리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부천시는 기증된 우산 중 고장 난 것은 분해해 수리 부품으로 쓰고 고칠 수 있는 것은 수리해 시민들에게 무료 대여하는 ‘리본(RE:BORN)우산’을 운영 중이다. 우산 수리와 재생, 대여, 일자리 활성화로 이어지는 이 사업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제품의 수명이 점점 짧아진다?!

2022년, UN은 전 세계 전자제품 폐기물의 재활용률이 4분의 1도 못 미친다고 발표했다. 또한 재활용률보다 폐기물 발생률이 5배 더 빨리 증가했으며, 폐기물 급증 요인으로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인한 전자기기 소비량 증가, 제한적인 수리, 제품 수명의 단축 등을 꼽았다. 서울환경연합이 제보받은 제품 수리 실패 사례(2023년 8월~10월)도 살펴보자. 당시 접수된 사례는 158건, 그중 65.2%는 제품이 5년도 안 되어 고장 났고 수리에 실패했다고 응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기술을 적용한 제품의 수명은 짧아졌다. 이는 ‘계획적 진부화’로 설명할 수 있다. 계획적 진부화란, 제조사가 빠르게 출시되는 신제품을 계속해서 판매하기 위해 기존 제품의 수명을 단축시키거나 유행에 뒤처진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심지어는 부품을 단종시켜 수리할 수 없게 만드는 행동을 말한다. 새 제품을 사는 것에 비해 고쳐 쓰는 것이 환경에 이롭고 더 경제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사는 것보다 수리비가 더 비싼 경우가 많고, 부품 자체를 구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혼자 고치려고 해도 방법을 알 수 없어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에서 ‘수리권’은 시작됐다. 수리권으로 인해 우리는 제품을 고쳐서 ‘내가 쓰고 싶은 만큼 더 오래’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니까, 부품을 구할 수 없거나 수리 방법에 대한 안내를 하지 않아서, 보증기간이 지나서 제품을 고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권리를 침해받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는 소비자로서, 지구를 공유하는 한 사람으로서 제품을 오래 사용할 권리와 환경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수리의 문턱을 낮춰주는 법, 일상이 되다

‘수리권’이라는 개념이 생소한 우리나라와 달리 해외에서는 이미 ‘수리권’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지난 6월 14일 유럽 의회는 EU 내에서 판매하는 스마트폰 배터리를 쉽게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배터리법'을 통과시켰다. 가장 주목받는 조항은 휴대전화 등 가전제품의 배터리를 소비자가 직접 쉽게 분리하고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다. 해당 조항에는 '사용자는 전용 도구, 열을 가하는 도구나 특별한 용제 없이 시중에서 판매되는 일반적인 도구만으로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고 규정돼 있다. 배터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소비자가 드라이버와 같은 일반적인 도구만을 사용해 스스로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제품 수리권 옹호 단체인 ‘리페어 닷 이유(Repair.eu)’는 2030년까지 EU에 판매되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배터리 교체형으로 만들면 온실가스 배출량을 30% 절감할 수 있으며, 배터리에 포함된 코발트, 희토류, 인듐 등의 낭비도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EU 회원국 중 수리권 강화를 위한 입법을 가장 앞서 추진한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에서는 2021년 1월부터 ‘수리가능성 지수’ 표시를 의무화했다. 수리가능성 지수란 제품에 수리 난이도, 부품 공급의 원활한 정도 및 가격 등의 기준을 점수로 매겨 표시하는 제도다. 이는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기 전, 수리 여건까지 고려해 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게 수리권은 좁은 의미에서 더 나아가 수리가 쉽고 수명이 긴 제품을 사용할 권리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애초에 튼튼한 상품을 설계·생산하거나 제품 구매 시 수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제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자가 수리 또는 사설 수리업체에서의 수리가 쉽도록 생산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럽연합은 제품 생산단계에서 내구성, 재활용성, 수리용이성 등을 고려해 제품을 설계하도록 하는 ‘지속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을 실시하고 있다.

미 뉴욕주 또한 2023년 말 ‘디지털공정수리보장법’을 시행해 스마트폰, 노트북 등에 대한 부품 및 문서 제공 등을 의무화했다. 소비자가 제품에 대한 정보와 도식, 수리를 위한 부품 등을 얻어 제품을 보다 쉽게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 콜로라도주는 지난해 휠체어에 이어 올해 농업용 장비의 수리권을 보장하는 법을 시행했다. 그 외에도 독일, 영국,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수리권에 관한 입법화를 했거나 추진 중이다. 국내 수리권의 갈 길은 멀다. 21대 국회에서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 '수리산업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발의됐지만, 채택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리할 필요성’에 대해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보통 가전제품을 구매할 때 에너지효율등급을 확인하곤 한다. 에너지 효율이 좋은 제품을 사면 에너지 비용도 적게 들고, 오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품의 수명은 지속가능한 재료를 선택하는 것뿐 아니라 제품의 수리 용이성과 재활용 가능성 등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이제는 ‘고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 보면 어떨까? 수리에 도전했다가 실패해도 결코 손해가 아니다! 그러한 시도는 필요한 새 물건을 구입할 때 제품의 수명과 부품 교체 여부를 한 번 더 고려하게 되고, 오래 쓸 물건을 고르는 눈을 갖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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