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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징병해라’ 청와대 청원에 동의 27만 넘겨
해묵은 논쟁, 번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유는
여성징병제 논란
여성을 군대에 입대시키거나 군사 훈련을 받게 하자는 ‘여성징병제’를 놓고 논쟁이 뜨겁다. 인구가 줄어 병역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여성도 군대에 가도록 하자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여성징병제가 젠더 이슈화하면서 남녀 성별 간 갈등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지난 4월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등장한 ‘여성도 징병 대상에 포함해 주십시오’는 나흘 만에 서명 인원 20만 명을 돌파하며 관심이 집중됐다. 5월11일 오전 기준 동의자 수는 27만 명을 넘었다. 청원인은 “나날이 줄어드는 출산율과 함께 우리 군은 병력 보충에 큰 차질을 겪고 있다”면서 “이미 장교나 부사관으로 여군을 모집하는 시점에서 여성의 신체가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는 핑계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성 평등을 추구하고 여성의 능력이 결코 남성에 비해 떨어지지 않음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병역의 의무를 남성에게만 지게 하는 것은 매우 후진적이고 여성 비하적 발상”이라며 “여자는 보호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듬직한 전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여성의 입대를 둘러싼 논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잊을 만하면 등장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지만 번번이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지난 2017년 9월에도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청원 글이 올라와 10만 명 이상이 동의한 바 있고 한 해 동안 올라온 관련 청원 글만도 10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됐다.
해묵은 이슈에 불을 지핀 건 정치권이다. 일부 여당 정치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로 오가던 내용을 공개적으로 꺼내 든 것이다. 특히 차기 대권 도전 의사를 밝힌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용진의 정치혁명’을 통해 ‘남녀평등 복무제’를 제안했다. 남녀 모두 최대 100일 동안 의무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박 의원은 최근 “행복 국가를 만들고 불공정과 불평등에 맞서는 용기 있는 젊은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남녀평등 복무제로 전 국민이 국방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선 공약을 내걸었다.
병역 자원 부족은 현실이다. 이용민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책브리핑 보고서를 통해 오는 2025년부터 징집 인원을 충원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위원은 19~21세 남성은 2023년까지 76만 8천 명으로 1차 급감(23.5%)하고 2030~2040년에는 46만 5천 명으로 2차 급감(34.3%)할 것으로 분석했다. 이에 따라 군 징집 인원은 2025년 8천 명 부족을 기점으로 심화돼 2039년에는 8만 7천 명이 부족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에 여성계 일각에서도 ‘논의는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우리 군의 여건상 여성의 의무복무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선거를 겨냥한 ‘선심성 립서비스’라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TBS 의뢰로 4월 23일부터 이틀간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천10명에게 ‘남녀평등 복무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 결과를 보면 찬성과 반대 의견이 비슷했다.
찬성한다는 응답은 45.6%였고 찬성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49.6%였다. 찬·반 응답의 차이는 4%p로 오차 범위 내였다. 연령별로 30대 이하는 찬성 응답이, 40대 이상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많았다. 지역별로 ‘남녀평등 복무제’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대체로 많은 가운데 광주·전라에서는 찬성 응답이 과반을 차지했다. 이번 조사는 휴대전화 가상번호를 활용한 무선 자동응답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p, 응답률은 6.8%였고, 통계보정은 올해 3월 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기준으로 성, 지역, 연령별 가중치를 적용했다.
해외에선 이스라엘, 북한, 노르웨이, 스웨덴, 모잠비크, 차드, 쿠바 등의 국가가 여성징병제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은 18세 이상 남녀 모두 징집 대상이다. 2020년 기준 남성은 2년6개월(특정 보직은 4개월 추가 목무), 여성은 2년(특정 보직은 8개월 추가 복무) 의무 복무다. 북한은 17세 이상의 남녀 모두가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그나마 2021년 남성이 10년이던 것이 8년으로 축소됐고, 여성은 5년간 복무해야 한다. 노르웨이는 여성징병제 논의를 유럽 전역에 확산시킨 나라로 주목받는다. 2013년 노르웨이 국회가 여성징병제를 승인한 뒤 스웨덴ㆍ네덜란드가 뒤따랐고, 독일ㆍ스위스ㆍ오스트리아ㆍ덴마크ㆍ핀란드도 논의 중인것으로 알려졌다. 노르웨이에선 여성징병제 대신 ‘성 중립적 징병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남녀 개인의 선택에 의한 복무로 기간은 19개월이다. 스웨덴은 2010년 폐지한 징병제를 2018년 1월 부활시키면서 여성을 징병 대상에 포함했다. 징병 대상은 18세 이상의 남녀로 9~12개월간 복무한다.
여성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실 여성계에서도 오래전부터 여성 군 복무제에 찬성 목소리를 내왔다.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남성 1천36명과 여성 9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더라도 여성 53.7%는 자신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특히 대상이 되는 2030 여성도 54∼55%가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 징병제에 긍정적 견해를 밝힌 셈이다.
한 여성 국회의원은 “남성 중심 징병제가 여성의 전 삶에 걸쳐, 특히 일자리나 직장 문화와 관련해 성차별의 근원”이라고 전제했다. 그는 “군대에 여성이 많아지면 여성 친화적 조직으로 바뀐다는 것은 그 사회에 성평등 문화가 확대되는 데 굉장히 좋은 요소”라면서, “이참에 모병제 논의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11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는 ‘징병제 논란’을 토론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군인권센터, 나라살림 연구소, 참여연대가 공동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군인권센터 측은 “정치권에서 연일 남녀평등 복무제, 모병제, 군 가산점 부활 등을 제안하고 있다”며 “편 가르기식 논쟁이 아닌 안보 환경과 군 구조 개혁 등 근본적인 질문을 검토하기 위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토론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인구 감소에 따라 현행 징병제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모두 공감했다. 하지만 모병제 등 병역제도를 개편하기에 앞서 우리 군이 처해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우선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정책 연구를 수행하는 민관 합동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사회적 갈등을 제도권 내부로 흡수해 숙의를 거치는 과정의 필요성도 강조했다.